공부하는 이유
2023-07-06
공부하는 이유
모두의 기대에 부흥하듯 중학생때부터 ‘우수한 학생’의 범주 안에 속했어야 했고 다행히도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았다. 여전히 공부는 재밌었으니까.
물리학은 내 심장을 뛰게 했다. 마치 온 우주를 담아서 한 입 거리에 쪼개서 주겠다는 속삭임 같았다. 나에게 물리 공식 하나는 도시 하나보다 값진 것이었고 눈으로 본 것보다 물리로 본 것들이 더 많았다. 내 눈과 입과 손은 물리학 안에 있었다. 그저 그안에 있는 것이 좋았을 뿐이다.
학문 안에 있을때면 무릇 스스로 강하다고 느껴지기 마련이다. 나는 더 멀리보고 더 많이 만질 수 있고 더 많이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. 고양되어가는 학문 안의 나는 그 밖 세상의 나와 괴리감을 키워갔다.
세상의 나와 학문의 나. 엄마는 둘 다 강해야 한다고 했다. 학문이 강한사람은 세상에도 강해야 한다고. 배운 사람만이 세상위에서 검을 들 수 있다고 했다.
세상의 나는 과연 강했는가. 날 에워싸고 있는 ‘물리’라는 학문이 과연 세상에서도 날 강하게 할 것인가. 세상의 답은 결코 아니었다. 그곳에서 강하려면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야했고 그들이 주목하는 시장에 쓰일 학문속에 있어야 했다.
불안했다. 나는 과연 세상에 강함을 증명할 수 있을까. 길을 바꾸어야만 할 것 같았다. 뒤로 걷는 것 같았다. 그 길은 외롭고 쌀쌀맞았다. 지켜줄 이가 아무도 없는 그런 길이었다. 방향을 늦게 틀수록 나는 더 혼자가 되는 기분이었다.
그 뒤로 난 원래 걷던 길을 걷지 않았다. 세상을 이겨내려면 그 뿐이었다. 이제 바꿔걸은 그 길에는 증명이 있을 줄 알았다. 그래서 세상에 나를 떠들어대기 바빴다. 떠들고 싶었다기 보다는 떠들지 않으면 안될 것 같았다. 세상에 말해야했다. 난 강한 존재라고. 그들이 증명을 받아주길 바라야했고 난 계속 증명해보여야했다.
얄팍하지만 내 내뱉음이 쌓이긴 했다. 종잇장 처럼 한장씩 높아져갔다. 그러나 학문에 있을 때 보다는 그 속도가 현저히 느렸다. 열에 하나도 안되는 수준이었다.
얄팍함에 눈치를 챈 것일까. 이렇게 쌓은 종잇장이 말 그대로 종잇장이 되는데에는 하루가 채 안걸렸다. 아득바득 세워 올린것이 흩어져 두 줌의 재가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.
허무했다. 이 일이 허무한 것이 아니라 그냥 삶이 허무했다. 분명 뭔가 채워져 있던 것이었는데 이젠 그렇지 않다. 비어있었다. 명쾌한 공명이 들릴만큼 깨끗이 비어있었다.
그래서 난 나를 쫒고 내가 쫒기던 세상과 단절되어 들어가기로 했다. 그들의 눈살과 잣대에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. 이곳에서는 나에게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. 해야할 것을 하는것. 그 이상으로 그 이하로 바라지 않았다. 이곳이 원하는 것들을 충족한 다음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.
이제 내가 내것이 되었다. 다시 삶이랄 것을 채울 기회가 되었다. 그 끔찍하게 명쾌한 공명소리를 지우려면 일단 뭐든 채워 넣어야했다. 세상을 공부로 쫒아갔으니 이제 공부로부터 도망가고 싶었을까? 세상의 눈초리에 못하던 것들을 미친듯이 해내고 싶었을까? 끔찍하게도 난 다시 펜을 잡았다.
내 손으로 든 펜은 더이상 무엇을 쫒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. 작은 심지에 들어있는 잉크로 무언가 채우기 위한 것이었다. 획 하나를 긋는 것은 유쾌한 일이었고 종잇장 따위가 쌓이는 지는 안중에 들 것이 아니었다.
이제야 다시 기억이 났다. 세상보다 공부가 먼저였다는걸. 그리고 내가 먼저였다는걸. 세상에 익을 주지 않아도 공부는 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. 나는 오직 공부를 위해 공부를 했어야 했다.
어디가 유망하고, 어디가 세상에 강하고, 누가 그것을 잘하고. 이런것들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. 그들을 위함이 아니라 날 위해 하는 것이니까.
그래서 난 여기서 다시 물리를 잡았다. 내 집, 내 고향. 나는 지금 참 나다운 곳에 들어가 있다.